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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첨부파일 이미지]() | 제12회 반야학술상 수상강연 자료http://banya.pibs-app.net/files | 반야불교문화연구원 | 2022-10-17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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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자 약력
2020 ~ 마르퀴즈 후즈 후(세계 3대 인명사전) 세계 지성 3% 및 평생회원
2015 ~ 한국연구재단 학술지 전문평가 위원
2005 ~ 2020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 학술저서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2018), 『국왕의 불교관과 치국책』(2013), 『한국의 세계불교유산』(2008), 『한국 중세의 불교의례』(2001)
■ 학술역서
『북종과 초기 선불교의 형성』(2018), 『한국 문명 원전』(2018), 『중국과 한국의 선사상 형성』 (2015), 『파란 눈 스님의 한국 선 수행기』(1999; 2000)
■ 학술공저
국・영문 10여 권(6개국-네덜란드,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한국-출)
■ 수상
2014, 2018, 2019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교육부 우수학술도서상
2016 제4회 청호불교복지대상(저술부문)
1999 제13회 불이상(연구부문)
● 수상강연
김종명(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안녕하십니까? 제11회 반야학술상 수상자 김종명입니다. 여전히 코로나 등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 아래서도 저를 오늘 이 자리에 서게 해 주신 (사)반야불교문화연구원 원장 지안 큰 스님, 저의 연구성과를 추천해 주신 학자님, 심사를 맡으신 심사위원님, 연구원 관계자분, 그리고 참석해 주신 내빈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잘못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냄”이란 뜻의 불교용어 “파사현정(破邪顯正)”은 중국 수나라의 길장(吉藏: 549~623) 스님이 처음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길장 스님은 공(空)사상 중심의 삼론종(三論宗)의 조사(祖師)로서 가상대사(嘉祥大師)라고도 불린 분입니다. 고구려의 승랑(僧朗) 스님은 이 삼론종 성립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고구려의 혜관(惠灌) 스님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파사현정이란 개념은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입니다. 저의 오늘 수상 강연도 비슷한 관점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행 우리 학계의 연구성과는 학술 저서와 논문으로 구분됩니다. 논문이 강조되는 자연과학계와 사회과학계와는 달리, 불교학이 연구되는 인문학계에서는 학술 저서의 중요성이 더욱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술 저서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박약한 것이 우리 인문학계의 현실입니다. 불교에 대한 관심도의 증가와 함께 불교 관련 서적 출판도 매년 늘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불교학 관련 학술 저서 출판은 손꼽을 정도로 적을 뿐 아니라, 그나마 학계의 검증을 거친 성과는 더욱 적은 것이 국내의 실정입니다. 교양서, 대중서들과는 달리, 그리고, 해외의 학문 선진국과도 달리, 국내 학계와 출판계의 관행으로 인해 학술서는 인세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책입니다.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지요.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학술 저서의 중요성을 높이 사 주신 반야불교문화연구원에 특히 감사드립니다.
제11회 반야학술상 수상작인 저의 책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 성격 재검토와 절차역주』는 2014년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연구비 지원에 의한 연구과제 최종결과물의 수정본입니다. 이 결과물은 익명의 심사자 3인에 의한 심사와 추후의 수정 과정을 거쳐 2018년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에서 전기의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2019년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교육부 우수학술도서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오늘 반야학술상 수상작이 되는 영광까지 안게 되었습니다. 아래에서는 이 책의 배경, 목적, 중요성, 내용, 특징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으로 수상 강연에 대신하고자 합니다.
1. 배경
저는 2001년에 간행된 저의 관련 학술서인 『한국 중세의 불교의례: 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를 통해 선행연구들의 문제점들을 분석한 후,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상당수의 관련 연구성과들이 나왔으나, 이 성과들은 새로운 주장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결한 채, 기존 주장들을 재생산해 온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이것이 이 책의 집필 동기가 되었습니다.
2. 목적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고려시대(918-1392)의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의 성격 재조명이며, 다른 한 가지는 연등회와 팔관회의 절차에 대한 기록인 「상원연등회의(上元燃燈會儀)」와 「중동팔관회의(仲冬八關會儀)」에 대한 연구 주(註) 중심의 역주입니다.
3. 중요성
이 책의 중요성은 고려시대 한국인들의 삶의 중요 모습과 동아시아불교의 성격 파악 및 현대 한국불교계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류의 학문 활동은 앎과 실천의 조화를 모색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정 사상에 대한 연구가 앎에 해당한다면, 의례에 관한 연구는 실천 분야에 속합니다. 오늘의 이 자리도 의례의 한 현장이듯이, 인간의 대부분의 행위는 의례화 되어 있어, 의례는 인류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공통분모일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당대인의 삶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역사상 전개되었던 한국불교를 포함한 동아시아불교에서도 의례의 역할은 중요하였으며, 여전히 그러하기 때문에, 불교의례에 대한 연구는 한국불교, 나아가 동아시아불교의 성격을 밝히는 데도 중요합니다. 따라서, 이 책이 세계 학계의 공용어인 영어로는 아직 출판되지 않았으나, 그 내용은 한국학과 불교학의 세계화 차원에서도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500년 전 불교의 창시자인 부처님은 인간 고통의 주요 원인들인 탐욕과 증오와 무지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셨으며, 이를 위해 바른 생각과 실천을 강조한 반면, 의례를 반대하셨습니다. 기원전 6세기 경, 불교 흥기 당시의 인도 주류 종교는 브라만교였으며, 브라만교의 핵심은 창조주인 브라만을 잘 모시는 것을 통해 인간의 행복을 기원한 데 있었습니다. 즉, 브라만교는 의례종교였던 것입니다. 잘 아시듯이, 불교는 이러한 브라만교에 반대하면서 생긴 전통입니다. 불교는 인류의 행복이 브라만교에서처럼 신 등의 외부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바른 생각과 그를 바탕으로 한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 가르침이었으며, 따라서, 초기불교(근본불교, 원시불교)에서 의례의 중요성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시공간적 변화와 함께, 의례는 불교의 중요 요소 중의 하나로서 역사적 산물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세계종교로서의 불교의 중요성은 그것이 문화종교란 점 때문이며, 문화종교로서의 불교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불교의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의례 연구는 최근 세계 학계에서 주목을 받아 온 연구 분야입니다. 세계학계에서 의례에 대한 연구는 18세기 이래 연구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학문적 검토는 19세기 후반의 산물로서 의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대에 시작되었으며, “의례학”(ritual studies)이란 개념도 등장하였습니다. 그 후, 의례에 대한 학계의 관심 증가와 더불어 1980년대에는 최초의 의례학 분야의 학술지도 등장하였으며, 현재 의례학은 세계에서 각광 받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학계의 의례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세계의 불교학 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해외 학계에서도 불교의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상대적으로 아직 큰 편은 아니나, 한국의 불교의례에 대한 연구성과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1994년의 저의 박사학위논문이 여전히 드문 영문 연구성과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해외 학계의 의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높으며, 1990년대 이래 세계 불교학계의 연구 흐름이 문화적 맥락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오고 있음을 고려할 때, 불교의례와 관련된 연구업적이 적은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내용
본서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의 내용은 고려의 대표적 정규 불교의례들인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의 성격 재조명 및 절차에 대한 역주입니다. 상원연등회는 음력 정월 보름날 열린 연등회를 말하며, 중동팔관회는 음력 11월에 개최된 팔관회를 말합니다. 고려시대 때 개최된 약 100 종류의 많은 불교의례들 가운데, 연등회와 팔관회의 개최일은 국가 공휴일이었으며, 연등회 때는 1일, 팔관회 때는 3일간의 공휴일이 주어졌습니다. 당시의 추석도 국가 공휴일로서 1일의 휴일이 주어진 점을 고려하면, 이 두 불교의례의 중요성이 아주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불교가 가장 성행한 시기였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불교사상 가장 자주, 큰 규모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불교의례가 개최된 시기기도 하였습니다. 국초부터 국왕이 주관하거나 참여한 불교의례가 빈번하게 설행된 것도 고려시대만의 특징이었으며, 소재도량, 신중도량, 제석도량 등 고려에서만 개최된 의례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연등회와 팔관회는 건국 시부터 멸망 시까지 고려와 함께 한 고려문화의 상징이었습니다. 고려 태조(918-43) 왕건은 그의 후대 국왕들에게 남긴 「훈요」에서 이 두 불교의례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의 지극한 관심은 연등[회]과 팔관[회]에 있다..... 후세에 간신들이 [이 의례들을] 늘이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는 것은 마땅히 철저하게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나도 또한 국왕이나 왕후의 제삿날에는 이 의례들을 열지 않을 것이지만, 이 의례들이 개최되는 날에는 임금과 신하가 같이 즐길 것을 처음부터 마음으로 맹세하였다. [후세의 국왕들은] 마땅히 [내 말을] 존중하고 [내 말에] 의하여 이 의례들을 개최할 것이다.” 고려의 역대 국왕들은 이 「훈요」 의 내용을 ‘태조 신앙’이라고 할 정도로 정책 결정에 중요하게 반영하면서, 팔관회와 연등회를 개최하였으며, 그 목적은 왕실의 조상 숭배, 국왕의 장수 기원 및 군신 간의 화합에 있었습니다.
불교에서 ‘연등’은 꽃, 향 등과 함께 부처님께 바친 공양의 하나로서, 그 교학적 의미는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의 삼독을 없애기 위한 지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사세왕수결경(阿闍世王授決經)』에서는 가난하였음에도 진실한 마음씨를 가졌던 한 노파가 켰던 작은 등은 당시의 임금이 켠 8만4천개의 등보다도 더 가치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전에 기록된 대로의 연등은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을 없앰으로써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한 가지 길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등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큰 등이나 비싼 등과 같은 물량적인 측면이 아니라, 등을 바치는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등의 이러한 성격은 역사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인도에서의 연등회는 부처에 대한 공양의 한 방법이었으나, 중국과 한국에서는 지배층을 위한 불교식 행사로 변하였습니다. 현대의 연등회는 국가적 행사로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되었습니다. 그러나, 축제의 범위를 넘어 연등의 불교적 의미가 잘 드러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현대 우리나라에서 매년 행해지는 대표적인 연등은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의 연등일 것입니다. 경향을 막론하고, 그 날에는 소위 유력 정치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부처님께서는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 두기를 하셨습니다. 또한, 큰 등일수록 비싸고, 그만큼 공덕이 많을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부처님이란 분이 공양의 양에 비례하여 복덕을 주시는 분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바른 생각과 그것에 바탕을 둔 바른 행위를 강조하셨습니다. 불전에서도 물질이 아니라, 등 켜는 이의 진실한 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진실한 마음이란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이 아니라, 남도 배려하는 자비심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팔관’이란 여덟 개의 빗장이란 뜻이며, 불자들이 옳은 행동을 하도록 규정한 여덟 가지 때로는 아홉 가지 불교 계율을 의미합니다. 『석씨요람』이란 불전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팔[구]계는 [1] 죽이지 말 것; [2] 훔치지 말 것; [3] 음행하지 말 것; [4] 거짓말하지 말 것; [5] 술 마시지 말 것, (6) 높고, 넓으며, 큰 침대를 사용하지 말 것; (7) 화환을 걸거나 향수를 몸에 뿌리지 말 것; (8) 노래하고 춤추며, 오락을 즐기지 말 것; (9) 정오가 지나면 먹지 말 것.” 즉, 인생살이를 통하여 오계를 지키고, 의, 식, 주를 간소하게 할 것을 강조한 가르침입니다. “고발사주,” “대장동 의혹,” 망국병이란 부동산 투기 등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도 이러한 가르침에 대한 무지 내지 탐욕의 산물이 아닐까요?
불전에 의하면, 인도의 불교도들은 한 달에 여섯 차례에 걸쳐 하룻 밤 하루 낮 동안 스스로의 수행을 위하여 이 여덟 가지 계율을 지켰습니다. 중국에는 “팔관재(八關齋)”라는 이름의 불교의례가 있었으나, 일본에는 고려의 팔관회에 해당하는 의례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팔관회는 화랑 전통 등을 포함한 한국 고유의 종교 전통을 포함하고 있어, 인도나 중국의 팔계 관련 의례와도 다른 특징들을 보여주었습니다. 현대에서도 팔관회는 특히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매년 개최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팔계의 정신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 지 묻고 싶습니다.
5. 특징
저의 책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는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선행 연구업적들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본서의 주제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일차자료를 바탕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연등회와 팔관회에 대한 기존 연구성과들의 상당수는 『고려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불교 연구는 『고려사』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고려사』의 한 부분인 「상원연등회의」와 「중동팔관회의」에 나타난 불교적 요소는 향과 등에 대한 간단한 언급 외에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조선(1392-1910) 초의 유학자들에 의해 편찬된 『고려사』가 지닌 한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고려사』는 물론, 『고려사절요』, 불전, 문집, 금석문을 비롯한 다른 관련 자료들과의 비교 연구도 진행되었습니다.
둘째, 기존의 연구성과들 중 상당수는 주제 관련 선행연구 검토 결여, 일차자료에 대한 불철저한 분석, 논증 부족 등의 공통적인 문제점들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본서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에서는 이 문제점들에 대한 극복을 위해 객관적인 논증이 시도되었습니다.
셋째,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는 국내에서는 드문 연구 주 중심의 역주서란 점도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불교학의 원전들은 대부분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문은 그 뜻이 다양할 경우가 적지 않으며, 한문의 이러한 특징은 주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비해 역주와 관련된 선행연구들도 상당히 진행되어 왔습니다만, 주제와 관련된 연구 부분은 없거나, 있더라도 해제와 단어 설명 중심의 설명 주에 머물렀습니다.
넷째,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는 형식에 있어서도 기존의 역주서들과는 차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존의 역주서들은 일반적으로 원문, 번역,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문이 상당한 지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연구업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주제와 관련된 논증 부분인데, 그 때 그 때마다 원문을 명기할 경우, 원문이 차지한 지면만큼, 논증 부분이 약화되어, 그 연구업적의 질적 약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서에서는 원문 명기는 최소 한도로 줄이고, 논증 확보에 더욱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선행연구들의 경우, 인용문의 출처를 밝히지 않아 표절의 혐의가 짙은 예 또한 적지 않았으나, 이 책의 모든 인용문에는 인용문의 줄 수까지 밝히면서, 정확한 출처가 명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 본서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는 국내 학계의 역주 내용과 방향에 대한 새로운 틀도 제시하였다는 학계의 평가도 받았습니다. 향후, 우리 불교학계의 발전적 미래를 위해서는 연구 주체의 전문화, 질적 수월성 지향, 형식의 구체화, 내용의 충실화 및 연구 주제의 다양화가 요청된다고 생각합니다.
반야불교문화연구원의 2018년도 춘계학술발표회의 제목은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 한국불교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사성제(四聖諦)’를 불교의 핵심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한국불교의 정체성 탐구도 여전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저는 1,6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이 땅의 불교의 내용은 초기불교가 아니라, 중국화된 불교며, 그 가운데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어긋나는 부분도 상당히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라의 원효(元曉, 617〜86)스님으로부터 비롯된 “통불교”와 자장(慈藏, 590〜658)스님을 원조로 한 “호국불교” 개념은 각각 한국불교의 사상적 특징과 역사적 특징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이 두 개념 모두 이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 한국불교의 정체성’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불교가 어려운 가르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상의 불교학자들이 좀 어렵게 만들어 놓기는 하였습니다만. “심조불산(心造佛山)에 호보연자(護保然自)라...”: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어느 지식인이 어느 덕망 높은 스님께 불교의 깊은 뜻을 물은 데 대한 스님의 답이었습니다. 이 지식인은 “심조불산”은 “마음이 부처의 산을 만든다”는 뜻일 테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의 산물임)”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호보연자”의 뜻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스님은 돌아가셨고요. 그 후, 그 지식인이 어느 날 산비탈에 걸린 현수막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산불조심 자연보호.” 저는 초기불교를 이처럼, 상식적인 가르침으로 생각합니다. 상식은 기본 교양을 뜻합니다. 상식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무시되기 쉬울 수도 있습니다만, 난세에 필요한 것은 오히려 상식이 아니겠습니까? 상식으로서의 초기불교는 기후 변화, 불평등, 코로나, 투기 등으로 점철된 우리의 현대사회에도 더욱 필요한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와 정치적으로 껄끄러운 관계에 있긴 합니다만, 일본의 불교학계에서는 1980년대 이래 대승불교의 핵을 이루는 공사상과 불성(佛性)(여래장[如來藏] 또는 본각[本覺])사상 등에 대한 논쟁이 “비판불교(批判佛敎)”란 이름으로 전개되어왔습니다. 이 비판불교론에 대한 북미주학계의 반응은 Pruning the Bodhi Tree란 책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었으며, 이 책은 『보리수 가지치기』란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번역, 간행되었습니다. 이 책의 편・저자들은 선불교의 대표 불전 중의 하나로서 신라의 법랑(法朗, fl. 7세기)스님의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과 한국불교계의 대표적 학승인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역사적 중요성과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력에 대한 공개 토론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요청에 대한 우리 학계의 반응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불교계에서의 인사말 중의 하나는 “성불(成佛)하십시오”입니다. “[불성을 깨쳐] 부처가 되십시오”라는 뜻이겠지요. 저는 이 인사말에 대해 평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모든 이들이 부처가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지금 이 자리에서도 여전히 드리고 싶은 질문입니다. 일례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특히, 마라톤 동호인이라면, 올림픽 금메달 수상자인 황영조 선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전문 선수도 아닌 일반 마라톤 애호가가 올림픽 금메달 수상자가 되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요? 황영조 선수로부터 배울만한 점을 적용시켜 자신의 마라톤 실력을 향상시키기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이미 부처님께서 인생살이의 길은 제시해 주셨으니, 불자로서는 그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시키기만 해도 더 나은 삶이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또한 “호국불교”란 이름 아래 20세기 전반기에 선종과 정토종을 비롯한 일본 불교계는 “공,” “무아(無我),” “업(業)” 등의 주요 불교 개념들을 왜곡하면서까지 전쟁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습니다. 특히, 선종은 무사도와 동일시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적 분석도 Zen at War와 Zen War Stories란 책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전자의 책은 일본어로 번역되었으며, 그 결과, 일본의 일부 승단은 전쟁 시의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였습니다. 후자의 책은 아직 일본어로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두 권 모두 각각 『전쟁과 선』, 『불교 파시즘』이란 제목으로 국역되었습니다.
우리 불교계에서는 “통불교론”과 “호국불교론”에 대한 일부 비판적 분석도 없진 않았으나, 전반적으로는 옹호 내지는 침묵 속에 있는 듯합니다. 주지하시듯이, 반야불교문화연구원과 반야학술상의 “반야”(般若)란 단어는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prajñā의 한자 음역으로서 ‘지혜’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 고의 근본 원인을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찾고 있을 만큼, 불교에서 지혜는 강조되는 개념인 동시에 다른 세계적인 종교들과도 구별되는 점입니다. 더욱이 불교의 지혜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 물질만능의 시대인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학의 중심지는 학계며, 불교학회는 불교의 지혜가 논의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국내 불교학회들 중 상당수가 학회인지 법회인지 구분이 애매모호한 상태에 처해 있는 현실은 안타까운 점입니다. 학회와 법회는 기능이 다른 만큼 학회는 학회다와야 하고, 법회는 법회다와야 할 것입니다.
반야불교문화연구원은 2011년 설립 이래, 학술대회 개최와 학술상 시상 등 불교계의 발전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의 수상자로서 학술대회의 성과물들이 학술서로도 출판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육은 지식 확산의 필수 요소지만, 훌륭한 교육은 훌륭한 연구를 전제로 하며, 불교학 분야의 최고 연구성과도 학술서이기 때문입니다. 국격의 향상과 한류 붐 등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세계적 위상은 과거에 비해 크게 높아졌음은 저도 해외 학회 참가 경험들을 통해 실감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주목을 받는 것은 1960년대까지의 세계 최빈국에서 수십 년 사이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그리고 빠르게 달성한 나라란 점에서지, 선진국 대접까지 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교학 연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예산도 물론 필요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총생산(GDP) 대비 연구비 예산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38개국 가운데 1-2위를 다툴 정도로 정부도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연구재단은 2009년에 새롭게 출범한 국가를 대표하는 연구 관리 전문기관입니다. 제가 아는 한, 이 재단의 2020년도 연구비 지원 예산은 4조 3000억원이었으며, 이 가운데 인문사회계 지원 예산은 3,000억원(7%)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마저도 불교학 연구를 위한 연구비 확보를 위해서는 다른 학문 분야와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일을 할 수 있는 우수 인재일 것입니다. “교육은 백년 대계”라고 합니다만, 한국불교학 분야에서 국내외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전문 학자 양성을 위한 국내 대학원은 아직 없습니다. 또한, 이 나라의 미래를 설계할 미래 학자도 제가 아는 한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반야불교문화연구원이 의지가 있고, 역량이 된다면, 세계의 학문 선진국과 겨룰 수 있는 한국불교학 분야의 전문 연구자 배출을 위한 명문 대학원 설립에도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희망해봅니다.
저도 오늘의 이 수상을 학문적 채찍으로 알고, 정신 건강, 몸 건강이 허락하는 한, 더욱 정진의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11월 7일
김종명
| 제 11회 반야학술상 수상 강연 자료http://banya.pibs-app.net/files | 반야불교문화연구원 | 2021-11-21 |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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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자 약력 -
김성철
2000. 3 ~ 현재 동국대학교(경주) 불교학부 교수
2014 ~ 2020 동국대학교(경주) 불교사회문화연구원장
2018 ~ 2019 (사) 한국불교학회 회장, 이사장
2017 ~ 2018 동국대학교(경주) 불교문화대학 학장, 불교문화대학원장
대표 저서 및 역서
용수의 중관논리의 기원』(2019);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 별기 대조』(2019) 등
『원효의 『인명입정리론』 주석과 그 특징』(2018), 『불교와 AI - 인공지능의 용 그림에 불교의 눈 그리기』(2018), 『판비량론』신출 필사본의 해독과 유식비량 관련 단편의 내용 분석』(2017), 등.
수상내역
2012 제6회 청송학술상
2007 제1회 올해의 논문상
2004 불이상
● 수상강연
먼저 우리 불교학의 발전을 위해 반야학술상을 제정함으로써 불교학자들을 격려해 주시는 존경하는 요산 지안 큰스님과, 제10회 반야학술상 수상자로 저를 선정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저는 13권의 저서와 4권의 번역서, 그리고 85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저서 가운데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붓다의 과학이야기(참글세상, 2014)’ 그리고 논문 가운데 ‘생명공학에 대한 불교윤리적 조망(불교문화연구, 2002)’ 등 여덟 편의 논문을 통해 불교와 과학의 접목을 시도해보았습니다.
이들 저서와 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주제에 대한 연구를 담았습니다. 첫째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불교윤리적 분석, 둘째 진화생물학에 대한 불교적 해석, 셋째 현대 뇌과학의 연구 성과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화엄학에 근거한 ‘마음’ 이론의 제시, 넷째 명상수행의 과학화를 위한 기계장치 제작과 실험에 대한 것입니다. 이들 네 가지 주제의 요점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줄기세포 연구는 체세포복제 수정란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살인’의 악업(惡業)과 관계됩니다. 율장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수정란 이후를 인간의 시작으로 보셨고, 낙태를 살인으로 간주하여 중죄로 취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줄기세포의 경우 몸 밖에서 체세포복제를 통해 만들어지기에, 그렇게 만들어진 줄기세포가 인간의 범위에 포함되는지 아닌지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율장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렇게 애매한 문제의 경우 행위자의 동기에 따라서, 그 행위의 선악 여부가 달라집니다. 과학자가 줄기세포를 해체하려는 동기와 목적이 순수한 자비심과 같은 선(善)이라면 줄기세포는 ‘인간’의 범위에 들어오지 않지만, 그 동기와 목적이 돈이나 명예를 위한 탐욕이라면 줄기세포는 인간의 범위에 들어온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 즉 줄기세포가 인간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그것을 해체하는 사람의 동기와 목적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식의 극한에서는 가치가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줄기세포연구는 인식론과 존재론과 가치론의 교집합, 이들 세 가지 이론이 모두 만나는 접점입니다.
둘째, 진화생물학은 두 가지 점에서 불교의 가르침과 흡사합니다. 하나는 생명체 형태의 변화에 대해 연기적(緣起的)으로 설명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진화 이론이 불교의 핵심인 고, 집, 멸, 도 사성제 가운데 고성제와 집성제의 실천적 이해라는 점입니다.
12세 싯다르타 태자는 벌레가 새에게 먹히고, 그 새를 다시 큰 새가 채가는 것을 목격합니다. 식욕의 집성제와 약육강식의 고성제 현장이었습니다. 그 후 출가해 35세에 보리수 아래서 깊은 사유에 들어가셨다가 도성제의 수행을 통해 멸성제를 발견하십니다. 찰스 다윈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고, 집의 두 진리만 발견했지만, 싯다르타 태자는 그곳으로부터의 탈출구인 멸, 도를 발견하셔서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비정한 진화의 세계를 넘어선 영원한 평화의 길을 발견하신 겁니다. 불교와 진화생물학을 비교할 때 고, 집성제에 대한 통찰에서 공통점이 있는 반면, 멸, 도성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특장(特長)이 있습니다.
셋째, 현대의 뇌과학 이론에서는 마음이란 뇌에서 창발한(Emergent)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진화과정에서 생명체의 신경계에 뇌가 생기면서 마음이 새롭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체의 진화과정을 되짚어 보면 이는 잘못된 이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무엇일까요? 저는 ‘불교와 뇌과학으로 조명한 자아와 무아’라는 논문을 준비하면서 그 해답을 ‘화엄경’ 법성게에서 찾았습니다. 법성게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먼지 한 톨 속에 온 우주가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일미진’은 마음의 객관적 측면이고, ‘함시방’은 마음의 주관적 측면입니다. 남이 나를 바라볼 때, 나의 마음은 뇌 속에서 요동하는 하나의 점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든 정보가 마음의 주관적 측면인 의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음이란 진화과정에서 창발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 물리적 우주 어느 지점에든 빨려드는 시방의 모든 정보를 의미합니다. ‘화엄경’을 보면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이라는 경문이 있습니다. “마음과 부처와 생명체, 이 세 가지는 다르지 않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는 온 우주이신 비로자나부처님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 어느 지점이든 비로자나부처님의 몸이고, 그 지점은 시방 모든 정보의 정신성을 내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뇌과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뇌에서 창발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물리적 우주 어느 지점에든 존재하는 함시방의 측면입니다. 마음의 정체에 대한 불교적 통찰이자 화엄적 통찰입니다.
넷째, 세친에 따르면 1찰나는 75분의 1초로 계산됩니다. 이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 인지 가능한 시간의 최소 단위입니다. 수십 년 전 동국대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부터 구사론의 가르침을 접하고선, 찰나의 길이를 재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년 전 안식년을 받아, 촉각의 영역에서 인지 가능한 시간의 최소 단위를 측정하는 장치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위빠사나 수행의 원리를 이용한 명상기계 사띠미터(Sati-Meter)를 제작하였고 한국연구재단의 융합연구지원사업에 선정되어 200여명의 피험자를 대상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고, 실험결과를 논문으로 완성하여 학회지에 발표하였습니다.
서구에서 명상 붐이 일어나면서 명상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명상의 심리적 효과, 명상 후 나타나는 뇌조직의 변화와 같이 명상의 결과에 대해서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지만, 명상하는 과정, 즉 명상수련과정은 전혀 객관화 되어 있지 않습니다. 명상의 과정을 객관화, 과학화하는 것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인데, 사띠미터는 명상과정을 객관화, 수량화, 과학화한 세계유일의 장치입니다. 사띠미터의 훈련 효과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실험이 필요하며, 치매예방, 노화에 따른 기억력 감퇴 예방, 주의력 결핍 회복 등을 위한 장치로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상 네 가지가 지금까지 제가 불교와 과학을 접목하면서 시도했던 연구들입니다. 이번에 제가 반야학술상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불교와 과학의 접목을 주제로 다양한 논문을 발표한 연구업적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불교를 젊은 세대에게 전할 때, 과학의 언어로 불교를 설명한다면 가장 설득력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입니다.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달로 전통종교가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에게 불교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 과학의 언어로 불교를 가공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 비해 희망적인 것은 불교라는 종교가 ‘발견된 진리’라는 점에 있습니다. 세상을 여실지(如實知)해 발견한 진리가 불교입니다. 현대 과학 역시 연구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이론을 도출합니다. 따라서 생물학이든, 물리학이든 그 가운데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한 이론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연각은 불교도 모르고 부처님의 존재도 모르지만 세상에 대해 의문을 품고서 깊은 사색에 들어가 연기법을 관찰함으로써 홀로 깨닫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불교를 모르지만 전제없이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연각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제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뉴턴이든, 찰스 다윈이든, 아인슈타인이든 모두 ‘익명의 불교도(Anonymous Buddhist)’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와 과학을 접목하는 일은 과학문명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불교를 설득력 있게 전하고, 깨달음의 학문인 불교학의 외연(外延)이 과학을 포함한 현대의 모든 학문의 영역으로 확장되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시대적 과제입니다.
그런데 현대과학 가운데 아직 제가 본격적으로 논의하지 않은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이론 물리학 분야입니다. 현대물리학의 경우, 완벽한 이해를 위해서는 고도의 수학적 소양이 요구되기에 일반인 범접하기 쉽지 않은 분야입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의 난제 몇 가지에 대해서는 불교학자로서 그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굵은 얘기를 몇 가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늦지 않은 시점에 현대물리학과 불교이론을 본격적으로 비교하는 연구에 들어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제10회 반야학술상의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모든 분들과, 반야학술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주신 모든 분들께 재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제 10회 반야학술상 강연 내용http://banya.pibs-app.net/files | 반야불교문화연구원 | 2021-08-16 | 21 |
6 | ![첨부파일 이미지]() | 제 9회 반야학술상 수상자 강연자료(본각스님)http://banya.pibs-app.net/files | 반야불교문화연구원 | 2020-06-11 |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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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자 약력 -
● 저술상 : 『율장의 이념과 한국불교의 정향』
이자랑(李慈郞)
2016.9∼현재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교수
2011∼2016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
2005∼2007 일본 도쿄(東京)대학 외국인특별연구원
1996∼2001 일본 도쿄대학 인문사회계연구과 인도철학·불교학 박사 졸업
(박사논문: 초기불교교단의 연구 -승가의 분열과 부파의 성립)
1993∼1996 일본 도쿄대학 인문사회계연구과 인도철학·불교학 석사 졸업
1990∼1993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석사 졸업
1986∼1990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대표 저서 및 역서
『율장의 이념과 한국불교의 정향(定向)』(2017); 『도표로 읽는 불교입문』(2016); 『붓다와 39인의 제자』(2015); 『나를 일깨우는 계율 이야기』(2009)
『열반경 연구 –대승경전의 연구방법시론』(2018), 『계율에 방울달기』(2017), 『대승불교의 탄생』(2016), 『인도불교의 변천』(2007) 등.
수상내역
2015 제30회 불이상
2012 제6회 선리연구원 학술상
2010 제7회 불교소장학자 연구지원사업
2007 제2회 불교학술진흥상
● 수상강연
- 율장의 이념과 한국불교의 정향 -
이자랑(동국대 불교학술원)
제가 집필한 『율장의 이념과 한국불교의 정향』(2017, 동국대출판부)을 반야학술상으로 선정해 주신 반야불교문화연구원의 원장 지안스님, 심사위원 여러분, 그리고 그 외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격려를 계기로 저는 다시금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책은 제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저는 일본 도쿄(東京)대학에서 초기불교교단사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상당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던 주제라 독창성 있는 논점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리저리 시행착오를 겪던 저는 어느 날 고민 끝에 빨리율 만을 챙겨 들고 도서실로 향했습니다. 승가의 생활상을 담고 있는 율장에서 초기불교교단의 역사를 재검토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초조와 기대를 동시에 느끼며 읽어나갔습니다. 기존의 연구 성과에 함몰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저 율장과 대화하는 기분으로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율장 대품 「꼬삼비건도」에 이르러 저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 구절과 마주하게 됩니다. 「꼬삼비건도」는「파승건도」와 더불어 부처님 재세 당시에 발생한 또 하나의 대표적 파승 사건을 다룬 장입니다. 화장실의 물 사용 문제로 비구들 간에 의견이 나뉘어 승가가 분열한 사건입니다. 화합을 권유하는 부처님에게 ‘이것은 우리들의 일이니 부처님은 잠자코 계십시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을 정도로 양측은 격하게 대립합니다. 결국 부처님은 그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버립니다. 그런데 이후의 상황이 흥미롭습니다. 대립하던 두 파 가운데 한쪽이 독립하여 포살 등의 갈마를 실행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부처님의 대답이 기묘합니다. “만약 그들이 내가 제정한 백(白, 안건의 제시)과 창설(唱說, 안건에 대한 찬반 여부의 확인)에 의해 각각 포살이나 갈마를 실행한다면, 그것은 여법한 행동이다. 이 비구들은 너희들과 부동주(不同住)이며, 너희들은 그 [비구]들과 부동주이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싸우다가 한쪽이 독립해서 나가버린 상황입니다. 완전한 분열(당시에 저는 이를 분열이라고 생각했습니다)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화합하고 함께 갈마를 실행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무슨 이유로 부처님은 이들의 행동을 용납하는 것일까? 그리고 용납의 근거로 제시되는 부동주란 무엇일까?나아가 이러한 이야기가 율장에 남겨진 이유도 궁금했습니다. 율장에서는 모든 사건이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판단과 지시로 해결되는 구조를 취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부처님의 중재가 무시되고, 보다 못한 부처님은 다른 지방으로 가버립니다. 서로 때리고 욕설을 내뱉으며 싸우는 비구들을 보다 못한 재가신도들은 더 이상 공양과 경배 등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최악의 상황을 보여주는 이런 에피소드를 율장의 편찬자는 왜 남겼을까?
이런 의문들이 바로 본서의 시작입니다.
저는 「꼬삼비건도」의 내용을 접하며 승가의 운영 방법에는 우리의 상식을 넘어선 무언가 특별한 이념과 실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한 줄기 빛이 보였고, 이후 이 건도를 중심으로 승가의 분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꼬삼비건도」에서 부처님이 언급하신 ‘부동주’라는 용어에 대한 검토가 출발점이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당시 제바달다의 파승은 많은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사건이었지만, 「꼬삼비건도」의 파승 사건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았습니다. 부동주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연구한 논문은 없었고, 몇몇 연구가 간단히 언급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부동주, 그리고 「꼬삼비건도」의 파승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해 간 승가의 분열과 화합에 대한 검토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부동주는 화합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고, 「꼬삼비건도」는 불멸 후 비구들 간에 심각한 분열이 발생했을 때 이를 극복하고 최종적으로 화합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한 장이었습니다. 화합, 여법(如法), 청정, 참회, 평등 등 승가의 운영과 관련하여 종종 언급되는 말들이 실제로 어떤 방법을 통해 실천으로 이어지는지, 그 구체적인 과정을 접하며 저는 승가라는 공동체가 갖는 가치에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꼬삼비건도」의 한 구절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승가 운영의 이념과 그 실천에 대한 연구 성과를 담은 것이 바로 본서입니다.
이제 책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제목부터 보겠습니다. ‘율장의 이념과 한국불교의 정향’,이 중 율장의 이념이라는 말을 통해 제가 제시하고 싶었던 키워드는 ‘여법(如法)’과 ‘화합(和合)’입니다. 그리고 한국불교승가가 석자사문으로 구성된 수행공동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한, 승가는 이 두 가지 이념에 부합하는, 일정한 방향성을 지향하며[定向]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을 본서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중심 주제는 화합의 정의, 여법화합갈마의 조건, 지도자의 역할 이 세 가지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승가는 화합승(和合僧, samagga-saṃgha)이라고 불립니다. 이는 승가가 화합을 승가 운영의 최대 이념으로 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화합이란 무엇일까요? 율장에서 화합은 전문용어입니다. 단지 사이좋게 지낸다고 하는 막연한 상태가 아닌, ‘갈마(羯磨, kamma)’를 올바르게 실행하고[如法] 그 결과에 따라 승가를 운영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갈마는 의사 결정을 위해 승가에서 실행되는 모든 의식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사안이든 가벼운 사안이든 예외 없이 갈마를 거쳐 결정됩니다. 이 갈마가 율장에 규정된 방법대로 여법하게 실행될 때 승가는 화합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화합=여법갈마의 실행이라면, 그 여법한 갈마의 조건은 무엇이며, 왜 그것이 화합의 조건으로 언급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싸우고 대립하는 것은 무언가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지거나 혹은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하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도 어느 정도까지는 참고 양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거나 반복되면 결국 화를 내게 됩니다. 갈마는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기 위한 장치입니다. 갈마는 종류에 따라 다양한 원칙을 필요로 하지만, 모든 갈마에 거의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 바로 ‘전원출석’과 ‘만장일치’입니다. 현전승가의 구성원이 한 자리에 모여 사안을 공유한 후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의 반대로 만장일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 사안은 다른 갈마를 통해 재차 다루어집니다. 특정 누군가의 강압적인 의견이 아닌, 반드시 모든 사안을 구성원 전원의 동의하에 결정하고 그 결과에 따라 승가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장일치’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모든 사안을 만장일치로 항상 결론짓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그 갈마가 구성원이 납득할 수 있는 절차와 내용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즉, 만장일치라는 조건이 의미를 갖는 진정한 이유는 단지 승가의 구성원이 모두 합의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닌, 갈마의 과정이나 결론이 여법하다고 여긴 구성원들이 바로 이 ‘여법’에 동의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명확한 원칙을 준수하여 만장일치로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훗날 이의가 제기될 가능성도 훨씬 줄어듭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갈마는 화합승의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합니다. 갈마의 절차는 정해진 대로 진행하면 되겠지만, 내용은 어떠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꼬삼비건도」의 사례를 보아도 옳고 그름에 대한 의견이 나뉘기 때문에 논쟁은 발생하는 것입니다.명확하게 판단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경우에는 덜하지만, 어려울 때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일한 가르침을 두고도 사람에 따라 다른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여법에 대한 판단은 사실 어렵습니다. 제가 이 점과 관련해서 주목한 것이 바로 ‘지도자’의 역할입니다. 경장이나 율장의 여러 사례로 볼 때 여법 여부에 대한 판단은 일차적으로 지도자격의 비구가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지도자의 독단적인 판단은 아닙니다. ‘여법’을 기반으로 한 지도자의 판단입니다. 수행이나 교리적 이해, 평소의 언행 등이 훌륭하여 구성원으로부터 존경받는 비구(장로라 불리는 인물들일 경우가 많겠지요)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여법한 기준을 제시하고 구성원은 그것을 함께 확인하는 것입니다. 즉, 승가 운영에는 여법한 기준의 확보가 필수적이고, 구성원은 그 내용을 공유하며 확인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에서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한국불교가 지향해야 할 몇 가지 방향성에 대해 서술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미 한국불교는 일반사회의 가치관에 상당히 동화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승가는 승가다워야 합니다. 승가가 추구해야 할 이념과 이를 위한 구체적 실천을 게을리 한다면 승가는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 점을 현재의 수계제도, 징벌제도 등을 통해 검토해 보았습니다.
앞서 “이 격려를 계기로 저는 다시금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승가의 운영 방법을 연구하며 승가가 세간과는 다른 출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확인했습니다. 한국불교에 승가가 존재하는 한, 가능하면 그러한 이념과 노력을 본받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부처님 당시에 이랬으니까 지금도 이래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대로 실천해야 된다고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한국불교의 승가가 지금도 화합, 여법, 청정, 참회, 평등과 같은 이념이 갖는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율장에서 말하는 승가 운영의 이념과 그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합도 청정도 기반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선배 수행자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다듬어 놓은 실천 방법에 눈과 귀를 여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언제부턴가 아무도 이런 방향을 원치 않는데 주책없이 떠드나 하는 생각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특히 실천해야 할 당사자들이 원하지 않는데 제가 좋다고 떠드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가지고 한국불교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을 때는 참 난감했습니다. 물론 이런 말에 제 연구를 중지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적어도 제 연구 성과에 부합하는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이번 수상이 제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제 수상 소식을 들은 어떤 교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한국불교가 안정되어 있다면 선생님의 글은 덜 주목 받았겠지요. 한국불교가 변화하는 날까지 열심히 하세요.”
이번 수상이 제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하고 감사한 이유입니다. ‘감사합니다.’
| 제 8회 반야학술상 수상자 강연자료(이자랑 교수)http://banya.pibs-app.net/files | 반야불교문화연구원 | 2018-11-06 | 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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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상 수상 논문 : "무아·윤회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
● 수상자: 임승택(경북대 철학과)
-약력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이며 인도철학을 전공했다. 현재 경북대학교 자율전공부장 및 글로벌인재학부장을 겸직하고 있다. 미국 UCLA에서 방문학자(visiting scholar) 과정을 마쳤고, 동국대학교불교문화연구원에서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동국대학교에서 'Paṭisambhidāmagga의 수행관 연구'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년간의 요가(Yoga) 수련과 지도 경력이 있으며 미얀마(Myanmar)의 위빠사나(Vipassanā) 명상센터에서 3개월씩 3차례의 집중수행을 마쳤다.
'초기불교 94가지 주제로 풀다'(종이거울, 2013), '붓다와 명상'(민족사, 2011), '바가바드기타 강독'(경서원, 2003), '빠띠삼비다막가 역주'(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1), 「무아․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불교학연구, 2015), 「한국 선불교와 힐링, 그 가능성에 대한 고찰」(한국불교학, 2013),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궁극 목표에 관한 고찰」(불교학연구, 2008) 등 50여 편의 저서 및 역서와 논문을 집필했다.
● 수상강연
* 논문요약문
수상작인 「무아 ․ 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한국불교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무아 ․ 윤회 논쟁’의 정당성에 대한 의구심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 논문에 따르면 무아와 윤회의 문제를 둘러 싼 그간의 논쟁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었다. 무아설과 윤회설은 각기 다른 차원을 지시하는 교설들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선행 연구자들이 전제했던 무아와 윤회의 모순적 관계란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한 이유에서 두 개념의 모순성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그간의 시도란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 논문은 무아와 윤회 개념의 소통 여부를 놓고 발발한 그간의 논쟁이 문제의 해결(solution) 모색이 아닌 문제 자체의 원천적 해소(dissolution)라는 국면에 다다랐다고 지적한다.
「무아 ․ 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불교학연구, 45호)를 발표하고 난 후 2년의 시간이 지났다. 발표 직후 일었던 거센 반향이 차츰 사그라지는가 싶더니 이제 내 자신의 기억에서마저 희미해져 가던 차였다. 뜻하지 않은 논문상 선정 소식에 깜짝 놀랐다. 논문의 가치를 인정받은 기쁨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학술상 운영진과 심사에 간여하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특히 이번 수상 논문은 기존의 연구에 대한 비판적 성격이 강한 까닭에 여러 심경이 교차한다. 논의의 발판을 마려해주신 선학들께 송구스러움과 감사의 마음을 함께 올린다. 그분들의 선행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언젠가는 나 자신도 다른 누군가의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기꺼이 희망한다.
무아(無我, anattan)란 자아(我, attan)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이것을 내용으로 하는 무아설은 붓다의 가르침을 특징짓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찾기란 쉽지 않다. 한편 불교라는 건축물을 떠받드는 또 하나의 기둥으로서 윤회(輪廻, saṁsāra)의 교리가 있다. 윤회란 자아가 생사를 반복하면서 지속됨을 뜻한다. 윤회설은 무아설에 의해 부정되었던 자아를 전제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무아설과 윤회설은 모순적 관계에 놓인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하겠는가. 혹은 윤회가 사실이라면 윤회의 주체인 자아를 인정하는 셈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아는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당혹감은 붓다의 교설에 중대한 문제점이 내포되지 않았는가 하는 위기의식으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많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모순성을 해결하고자 시도하였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불교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무아 ․ 윤회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학술적 담론의 분위기를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동서철학을 막론하고 전공 분야를 달리하는 수많은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수십 편에 이르는 단행본과 소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들의 논의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진 불교교리사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듯했다. 무아와 윤회는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지닌 연구자들을 하나의 관심사로 엮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 논쟁은 André Bareau, La Vallée-Poussin, Walpola Rahula, Varma, Rhys Davids, 水野弘元, 宇井佰壽, 中村元 등의 해외 석학들의 견해가 대거 인용되면서 한국불교학계의 울타리마저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무아 ․ 윤회 논쟁’에 가담했던 연구자들의 열의는 뜨거웠으며 그 진정성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무아․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라는 이번 수상 논문은 그간의 논의에 전제되었던 문제의식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한 의구심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리고 ‘무아 ․ 윤회 논쟁’은 그 출발 시점에서부터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무아와 윤회는 각기 다른 차원을 지시하는 교설들이다. 따라서 서로는 충돌을 일으키는 모순적 관계가 아니며, 그러한 이유에서 그들의 모순성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 또한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아와 윤회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해탈의 경지가 괴로움의 현실과 다른 차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아와 윤회의 모순적 관계에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이 다르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못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무아와 윤회의 모순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피안과 차안을 대립 관계로 간주하고서 서로를 지양(止揚)하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무아 ․ 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일관된 논지 전개를 위한 전략으로 초기불교라는 한정된 무대를 선택하였다. 붓다의 교설은 부파불교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거쳐 재구성되었고, 중관불교, 유식불교, 여래장사상 등의 여러 구비를 통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아와 윤회의 문제를 둘러 싼 그간의 논의가 혼선의 양상을 보인 데에는 각각의 시대적 불교 해석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이 고려되지 않은 채 서로 뒤엉킨 탓이 크다. 이러한 반성은 초기불교라는 한정된 텍스트를 중심으로 무아와 윤회를 바라볼 때 보다 분명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고, 또한 이상과 같은 당혹감과 위기의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연결되었다. 이 논문에서 언급된 무아 ․ 윤회 ․ 해탈 등의 개념은 모두 초기불교의 문헌에 근거를 둔 것이며 대승불교에서 언급하고 있는 개념들과는 차이가 있다. 이 논문에서 견지한 기본 입장은 교리사적 변천 과정을 간과한 채 무아와 윤회의 모순 혹은 병합을 거론하는 것에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 논문은 연기설(緣起說)에 대한 한국불교학계의 편향적 이해 경향을 강력히 비판한다. 무아 ․ 윤회 논쟁에 가담한 연구자들은 “연기에 의한 세계의 생성 ․ 변화 과정은 어떤 기체(基體)로서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설명이 가능하다.”라는 전제를 수용한다. 즉 연기란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러한 이유에서 무아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연기와 무아를 연결시킬 때 생성 ․ 변화하는 세계의 운행을 상징하는 윤회와 고립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교리는 무모순적 공존 관계로 양립할 수 있게 된다. 무아 ․ 윤회 논쟁에 참여했던 연구자들은 각기 다른 표현법을 사용하여 논박을 주고받았지만 대체로 이러한 시각을 공유하면서 무아와 윤회의 모순성을 해결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이 점에서 상호의존성(相互依存性)에 입각한 연기 이해는 무아와 윤회를 공존하는 관계로 바라보게 해주는 이론적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 해석이란 대승불교의 발달된 교리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초기불교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다. 이 논문의 후반부는 박경준, 권오민, 각묵스님 등의 최근 견해를 소개하면서 바로 이 부분을 규명하는 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유감스럽게도 김동화 선생 이후 한국불교학계에서는 연기에 대해 사물의 발생과 운행을 규명하는 물리적 법칙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연기를 법칙의 일종으로 간주하게 되면 태어남과 늙음 ․ 죽음으로 귀결되는 연기의 순환구조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한 방식의 연기는 폐쇄적 ․ 결정론적 체계로서 실천 수행을 통한 해탈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와 같은 연기 이해에 근거한 무아는 괴로움의 현실을 넘어서게 하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며, 오히려 괴로움의 현상 세계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도록 유도할 뿐이다.
바로 이것이 그간의 ‘무아 ․ 윤회 논쟁’이 야기한 논리적 귀결이다. 무아와 윤회의 모순성을 해결했다고 자인하는 견해들은 대체로 이러한 이해 수준을 내보이고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판단하더라도 무아와 윤회의 회통은 극복되어야 할 상태인 윤회와 그것을 넘어선 경지인 무아를 동일한 차원에 위치시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무아와 윤회가 공존하는 것이라면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아를 깨달아야 할 이유가 희석될 수밖에 없다. 결국 그러한 이해 방식은 각기 다른 차원을 드러내기 위한 교설인 무아와 윤회 모두의 취지를 거스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 논문은 무아와 윤회의 문제에 관한 그간의 논쟁이 정당하지도 못했고 타당하지도 않았다는 최종 결론에 도달한다. 이제 무아 ․ 윤회 논쟁은 문제 해결(solution)의 모색이 아닌 문제 자체의 원천적 해소(dissolution)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다.
수상 소감문이 작성하다 보니, 논문을 발표하던 당시의 긴장감에 다시 휩쓸리는 기분이다. 지금 살펴보아도 과격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논문은 한국불교학계의 주류적 이해 경향에 대해 비판적이다. 따라서 발표장에서부터 큰 반향이 있었다. 어떤 선배님은 “선학들의 권위를 뭉갠 이런 논문이 발간되지 못하도록 내 손에서 막아야겠다.”라고 하셨고, 다른 어떤 분은 “언급된 내용들 하나하나가 핵폭탄 급이다.”라고 하였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무아에 대한 이해의 패러다임을 바꾼 논문이다.”라는 등의 우려와 찬사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이번 수상으로 이 논문이 다시 주목을 끌게 되었다. 흡족할 만한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졌다. 이제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라는 말씀에 대답할 때가 되어간다. 이번의 수상작은 문제제기의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해결책도 스스로 내놓아야 한다. 두어 편의 후속 논문을 준비 중이다.
| 제 7회 반야학술상 수상자 강연자료(임승택 교수)http://banya.pibs-app.net/files | 반야불교문화연구원 | 2018-02-26 | 50 |
3 | ![첨부파일 이미지]() 
● 저술상 수상 도서 : "심층마음의 연구"
● 수상자: 한자경(이화여대 철학과)
-약력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서양철학(칸트철학)을 공부하고, 다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불교)을 공부하였다. 계명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아의 연구: 서양 근·현대 철학자들의 자아관 연구', '자아의 탐색', '유식무경: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동서양의 인간 이해', '일심의 철학',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불교의 무아론', '명상의 철학적 기초', '한국철학의 맥', '대승기신론 강해', '화두', '선종영가집 강해', '심층마음의 연구' 등이 있다.
● 수상강연
인간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투명한 앎,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고 싶다는 그런 바람을 갖고 철학을 공부한지, 또 그러면서 알게 된 불교를 공부한지 수십 년이 지나갔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하나를 한 순간도 떨쳐버릴 수 없는 화두처럼 가슴 속에 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화두는 쉽게 타파되지 않고 나이는 점점 많아져 회갑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가끔 ‘나는 끝내 알지 못한 채 이 생을 마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불안하기도 하고, 또 가끔 ‘내 모든 노력이 이렇게 부질없구나’ 싶어 서럽기도 한, 그런 때가 종종 있습니다.
금년 늦은 봄 그간의 생각을 정리한 책을 내놓고, 다시 가을로 접어들면서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저는 제가 아직도 인간 내지 마음에 대해 다 알지 못하고, 아직도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그런 궁극(구경각)에 이르지 못하는 한, 대원경지의 지혜로써 확철대오하지 않는 한, 길 위에 있음은 아직도 여전히 방황이고 어리석음이고 무명이며, 모든 노력이 결국 어둠 속의 헤맴, 암중모색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어 성불할 수 있다는 그 믿음을 마음속에서 지워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인생이 이렇게 길고 긴 꿈속을 헤매듯 암중모색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무척이나 허탈해집니다.
제가 허탈감에 빠져 다시 저를 세워줄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반야학술상을 받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직 헤매는 길 위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길 위에 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함께 하며, 함께 도반으로서 서로 지켜주고 서로 이끌어주면서 그중 가장 힘든 자에게 보내는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제가 오늘 받게 되었다는 생각에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앞으로도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정진하라는 격려의 박수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가 지금까지 그 길 위에서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 <심층마음의 연구>에서 제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저는 우리 모두가 낱낱으로 흩어져 각각으로 살아가는 개별적 실체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고 믿습니다. 불교는 그것을 상의상관성, 연기(緣起)라고 말하고 현상 제법을 하나의 그물인 인드라망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굳이 불교를 논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일체 만물의 상호의존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간 속 우리의 삶이 이미 서로 얽혀있는 방식으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자연에서의 먹이사슬 관계가 모든 생명체의 상호의존성을 말해주고, 사회에서의 상호 경쟁과 투쟁의 관계 또한 인간 서로 간의 상호의존성을 보여준다고 봅니다. 풀은 소에게 먹히고, 소는 사람에게 먹히고,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 다시 풀에게 먹히므로, 어느 것 하나 그 자체만으로 고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상호의존관계에 있습니다. 즐거움과 고통, 빛과 어둠,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맞물려 있어 하나를 통해 다른 하나가 성립합니다. 그렇듯 인간 사회에서 승자는 패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고, 흑자는 적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일체는 그렇게 상호의존적인 대대(待對)의 관계, 상즉(相卽)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이러한 상호의존관계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저는 불교가 말하는 연기는 이러한 상호의존성을 넘어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대의 관계를 따라 일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그 안에서 생사가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 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라면, 불교의 연기는 유전문뿐 아니라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환멸문(還滅門)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사윤회를 벗어남의 의미가 무엇인지, 환멸의 길은 어떤 길인지, 그 길을 찾다보니, 표층의 대대를 넘어 심층의 절대로 나아가게 되고, 표층의 분별적 의식을 넘어 심층의 무분별적 마음, 불이(不二)의 마음, 한마음, 일심(一心)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제 책 제목 중의 ‘심층마음’은 바로 이 불이의 마음, 일심을 의미합니다.
저는 번뇌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 불교수행의 핵심은 이원적 표층에서 불이의 심층으로, 표층의 상대에서 심층의 절대로, 표층의식에서 심층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표층에서는 a와 –a가 서로 상대가 되고 대대가 되어, 하나는 다른 하나를 통해 성립합니다. 에셔의 그림 <천사와 악마>에서 천사와 악마, a와 –a는 서로 대대의 관계입니다. a는 –a를 통해 a로 존재하고 a로 인식됩니다. 빛은 어둠을 통해 빛이 되고, 어둠은 빛을 통해 어둠이 됩니다. 행복은 고통이 있기에 고통 아닌 행복으로 의식되고, 고통은 행복이 있기에 행복 아닌 고통으로 의식됩니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습니다. 불교인식론은 이것을 ‘아포아(aphoa)론’으로 설명하고, 서양철학은 이것을 ‘변증법’으로 설명합니다. 모두 표층 현상세계의 질서와 표층 의식의 작동방식을 설명하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층에서의 대대의 관계, a와 –a의 상즉의 관계 안에는 더 깊은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고 봅니다. 즉 a와 –a가 서로 상즉(相卽)일 수 있는 것은 그 둘이 서로 상입(相入)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a안에는 –a가 포함되어 있고, -a안에는 a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사 안에 악마가 담겨 있고, 악마 안에 천사가 담겨 있습니다. a와 –a가 서로의 안에 서로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은 그렇게 상즉(相卽)이면서 상입(相入)입니다. 그런데 a안에 –a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렇게 상대를 자신 안에 포함한 그것은 결국 무엇이겠습니까? -a안에 a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렇게 자기 아닌 것을 자기 안에 가진 그것은 결국 무엇이겠습니까? 각각은 결국 전체이며, 전체로서 그 둘은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입니다. 이렇게 해서 a와 –a는 표층에서는 서로 다른 것으로서 대대(待對)를 이루지만, 심층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서 불이(不二)이며 전체인 절대(絶對)가 됩니다. 심층은 빛과 어둠이 나뉘기 전, 고통과 행복이 이원화되기 전, 천사와 악마가 서로 다른 것으로 그려지기 전, 너와 내가 서로 다른 존재로 분별되기 전, 일체가 이원화 내지 상대화되기 전, 그 모든 분별 이전의 절대의 전체, 하나의 전체입니다.
이 전체로서의 심층은 이원화된 표층의 현상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층입니다. 표층에서 천사와 악마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심층에서 천사와 악마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포함한 전체로서 하나입니다. <천사와 악마>의 그림에서 심층을 찾자면 그것은 바로 그려진 천사와 그려진 악마 아래에 있는 전체의 빈종이, 빈 바탕입니다. 그것은 그려진 일체의 모습인 상(相) 너머의 성(性)이고, 현상적 유와 무를 넘어선 공(空)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층의 이원적 분별인 상에 막히지 않고, 심층의 하나, 불이의 빈 바탕, 공(空)으로 깨어 있는 마음, 그 무소주(無所住)의 공(空)의 마음을 ‘심층마음’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유식은 이 심층마음을 자신 안의 종자(정보‧에너지)에 따라 현상으로 변현하는 제8아뢰야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림의 빈종이인 빈 바탕이 움직여서 그 위에 온갖 그림이 그려지는 것으로 떠올리면 됩니다. 심층 제8아뢰야식이 주와 객, 견분과 상분으로 이원화하여 우주 전체, 일체 제법(기세간)을 형성합니다. 나머지 식(7전식)들은 그렇게 그려진 세간 속에서 일어나는 표층식입니다. 제7말나식은 제8식의 견분 또는 세간 속 유근신을 붙잡아 그것을 자아라고 집착하여 ‘나는 나다’라는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을 일으키고, 자아 바깥의 세간을 사물 자체라고 집착하여 법집(法執)을 일으키는 근본번뇌의 식, 염오의 망식(妄識)입니다. 제6의식은 그러한 말나식의 아집과 법집에 의거해서 대상세계를 분별하는 분별의식입니다. 저는 <심층마음의 연구>에서 이와 같은 유식의 마음 이해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책의 부제를 <자아와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아뢰야식>으로 하였습니다. 저는 현상 세계 전체를 형성하는 빈바탕으로서의 심층마음인 아뢰야식이 바로 ‘일체유심조’의 심,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심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일체 존재를 자신 안에 담는 그 무한의 마음을 <기신론>은 ‘진여심(眞如心)’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바로 모든 중생 안에 깃든 ‘부처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불교는 언제나 우리 일반 범부 안에 있는 이 심층마음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해명하고 일깨우며 각성시키고자 노력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심층마음의 연구>에서 저는 심층마음에 대한 불교의 해명이 서양철학, 특히 칸트 및 독일관념론과 어떤 지점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갖는지를 설명해보았습니다. 서양철학 중에서는 칸트와 독일관념론이 가장 불교 유식사상에 근접한 사유의 깊이를 보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내면과 심층으로 향하면서 무분별(불이)과 융합을 지향하는 동양적 사유와 외부와 표층으로 향하면서 분별과 분화를 지향하는 서양적 사유 간의 차이를 읽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저는 제 책에서 그와 같이 내면과 심층으로 향해 그 안에서 우주 전체를 다시 발견하는 불교적 사유가 갖는 현대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파편화되고 계량화되고 외화되어 있는 오늘날 우리는 바깥으로 드러난 모습, 상(相)에 이끌려 살고 있습니다. 상의 차이를 따라 서로 대립하는 분별의식과 경쟁의식이 비대해지면 사회는 결국 이기적 욕망의 각축장이 되어 버립니다. 무한 탐욕에 의한 승자독식의 사회, 거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와 고통의 지옥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상 너머의 성, 차이 너머의 보편, 이원성 너머의 불이, 채움 너머의 비움을 말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오늘날 더욱 더 절실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너가 표층의 모습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심층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라는 것, 절대평등의 존재라는 것, 사실은 모두 하나로 공명하는 한마음이고 한생명이라는 것, 불교가 이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심층의 한마음을 자각함으로써만 우리는 표층 자아의 좁은 울타리(장애)를 벗어나 모든 인간과 모든 생명체, 우주 만물에 대해 자비(慈悲)의 마음을 갖게 되고, 모든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하려는 보살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책속의 글들은 모두 책상 앞에서 일어난 머리 속 생각의 표현일 뿐입니다. 저는 아직 심층마음의 그 자리, 아집과 법집을 넘어선 그 자리, 색자재(色自在) 심자재(心自在)의 그런 경지에 있지 못합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인간과 마음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여전히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격려해주시는 만큼 계속 부지런히 정진해서 바른 앎, 정견(正見)에 이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견에 이르면 그때 비로소 좀 더 떳떳하게 밖으로 나와 많은 사람들과 손을 잡고 웃으면서 구경에 이르는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제 7회 반야학술상 수상자 강연자료(한자경 교수)http://banya.pibs-app.net/files | 반야불교문화연구원 | 2018-02-26 | 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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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회 반야학술상을 수상한 두 분께서 수상소감과 더불어 수상강연을 해 주셨습니다. 논문상을 수상하신 박찬국 교수님의 강연 전문입니다.
논 문 상 : 박찬국(서울대 교수)
- 수상논문 : 유식불교의 삼성설과 하이데거의 실존방식 분석의 비교
- 강연주제 : “불교와 하이데거의 대화”
- 수상자 약력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비롯한 실존철학이 주요 연구 분야이며 최근에는 불교와 서양철학을 비교하는 것을 중요한 연구과제 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
- 저서
『불교와 하이데거의 비교연구』, 『니체와 불교』, 『내재적 목적론』, 『초인수업』, 『그대 자신이 되어라 - 해체와 창조의 철학자 니체』,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나치였는가』 등이 있고, 역서로 『헤겔 철학과 현대의 위기』, 『실존철학과 형이상학의 위기』, 『니체 I, II』, 『근본개념들』, 『아침놀』, 『비극의 탄생』, 『안티크리스트』, 『우상의 황혼』, 『상징형식의 철학 I』, 『상징형식의 철학 II』 외 다수
● 수상강연
- 불교와 하이데거의 대화 -
박찬국(서울대 철학과)
먼저 반야학술상이라는 귀한 상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반야학술상이 통도사에서 주관하는 상이기에 반야학술상은 저에게는 더욱 귀한 상으로 다가옵니다. 이는 통도사는 무엇보다도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경봉스님께서 오랫동안 주석하셨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30대에 경봉 스님의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면서 자주 꺼내 보곤 하였습니다. 주장자를 짚고 반듯하게 서서 형형한 눈빛으로 앞을 보고 계셨던 경봉 스님의 모습은 저에게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지만 불교에 큰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불교는 서양철학에서 보기 힘든 정신의 깊이에 닿아 있을 뿐 아니라 중관학과 유식불교에서 보듯이 사물의 실상을 파악하고 인간의 마음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서양철학에 못지않은 정치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서양철학을 주로 연구하면서도 일찍부터 서양철학과 불교사상의 비교를 저의 가장 주요한 철학적 과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동안 저는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연구』, 『니체와 불교』라는 두 권의 책을 통해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려고 했으며, 현재는 쇼펜하우어와 불교를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또한 이번에 수상하게 된 저의 논문 <유식불교의 삼성설과 하이데거의 실존분석의 비교>를 발전시켜서 유식불교와 하이데거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일찍부터 많은 학자들이 하이데거 사상이 불교 사상에 대해서 갖는 가까움에 주목했습니다. 서양에서 나타난 수많은 사상들 중 특히 하이데거의 사상이 동양의 불교사상에 그렇게 큰 가까움을 갖게 된 까닭은, 하이데거가 서양의 전통형이상학을 극복하는 새로운 사유방식을 개척하려고 하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불교적인 사유방식에 가깝게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까움은 하이데거 자신이 불교 사상을 직접 접하면서 이러한 사상들에 담긴 통찰들을 수용하는 가운데 더욱 심화되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일설에 의하면 하이데거는 선불교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선불교를 서양에 소개한 일본의 스스끼 다이세츠의 선소개서를 읽은 후 ‘자신이 말하려고 한 것은 이미 이 책에 다 있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하이데거는 서양의 형이상학은 존재자들의 근거를 따져들어 가는 사유방식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지배되어 왔다고 봅니다. 이러한 사유에는 인간의 지성적 능력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이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존재자들을 실마리로 하여 그러한 존재자들의 공통된 본질과 존재자들 전체의 궁극적인 존재근거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낙천적인 믿음은 만물의 존재구조는 만물의 근거를 따져 들어가는 인간 지성의 구조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전제에 입각해 있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서양의 형이상학은 사실은 세계의 실상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지성이 자신의 개념틀을 강요하면서 세계의 실상을 은폐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플라톤 이래의 서양의 형이상학이 이데아나 신과 같은 영원한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에 의거함으로써 인간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해 왔다면, 근대과학과 그것에 입각한 근대기술은 사물들을 조작하고 지배함으로써 인간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분석만이 사물의 진리를 드러내는 유일하게 타당한 사고방식으로 보고 있지만, 하이데거는 과학적 분석 역시 서양의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진리를 그 자체로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이해관심에 입각해서 사물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과학적인 분석은 사물을 기술적으로 조작하고 지배하려는 이해관심의 시각에서 존재자들을 고찰하기 때문에 존재자들은 그 자체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러한 이해관심의 관점에 의해서 여과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세기 동안 찬미되어 오던 이성이야말로 사유의 가장 완강한 적대자라는 사실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참다운] 사유는 시작된다.”
사물의 실상을 그 자체로서 드러내기 위해서는 사물들을 조작하고 지배하려는 이해관심에서 벗어나 사물이 그 자체로서 스스로 드러나도록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사물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사물이 자신들의 진리를 여여(如如)하게 드러낼 수 있는 철저한 개방성(Offenheit)의 구현을 지향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이러한 개방성은 불교가 말하는 공성(空性)에 상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이데거와 불교에서는 사물의 실상 자체에 이르는 길로서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하이데거는 방념(放念, Gelassenheit)을 말하고 있고 불교는 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성을 예리하게 갈고 닦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의 날카로움을 꺾고 사물들에 대한 지배욕에서 벗어나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가라앉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마음이란 몸과 분리된 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 전체를 다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양의 전통형이상학과 현대의 과학에서는 사물의 진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성을 예리하게 해야 한다고 보지만, 하이데거와 불교는 사물의 실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격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물의 실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에서 인간은 비본래적인 실존에서 본래적 실존으로 변화되어야 하며, 불교에서는 인간은 각자(覺者)가 되어야 합니다.
하이데거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정교한 기술문명체계에 대해서 존재자들의 진리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단순하고 소박한’(einfach) 삶을 대안으로 내세웠습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서양의 역사를 세계 내에서 인간의 안전이 갈수록 공고해져 가는 진보의 역사로 보고 있지만, 하이데거는 오히려 서양의 역사를 인간이 진리에서 갈수록 멀어져 가는 역사로 보고 있습니다.
세계 내에서 인간의 안전을 도모하는 인간의 노력은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에서 정점에 달하지만, 과학기술문명으로 귀착되는 서양의 역사를 진보의 역사로 볼 때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대화는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역사이해에서는 서양은 과학기술문명을 탄생시킨 지역으로서 모든 지역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동양은 후진적인 지역으로 간주됩니다. 이렇게 하나의 문명이 다른 문명에 비해 후진적인 것으로 간주될 때 두 문명 간의 대화는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처럼 서양의 역사를 오히려 진리에서 멀어져 가는 역사로 볼 때 두 문명 간의 대화는 가능하게 됩니다. 아니 오히려 과학 기술적인 사고로 이어지는 서양의 사유의 길과는 전적으로 다른 사유의 길을 개척해 나간 동양의 사상은 과학기술문명의 전일(專一)적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적인 사유의 길을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와 동양사상, 특히 그 중에서 불교와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것들 간의 대화는 서로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청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와 하이데거를 비교하는 저의 논문은 이상과 같이 불교 사상과 하이데거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사태를 지향한다고 보는 관점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양자는 이렇게 동일한 사태를 지향하고 있기에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서로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저의 문제의식은 야스퍼스가 말하는 세계철학의 이념과 닿아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차축시대(車軸時代, Achsenzeit) 이래 동양과 서양의 고전적 철학에서는 인간과 세계를 포함하는 존재 전체의 실상에 대한 경험과 그것에 대한 통찰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차축시대란 기원전 800년 전부터 기원 후 200년 사이의 시대를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에 중국, 인도, 이란, 팔레스티나, 그리스에서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이 지금까지의 우리의 의식을 형성한 정신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에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근본물음들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대답이 주어졌던 바, 이러한 대답들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삶과 사유의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이 당시에 신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나 예수에서 보듯이 어떤 특정한 부족이나 민족만을 선민으로 우대하는 부족신과 민족신의 차원을 넘어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인류 전체의 신으로 이해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자신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갖는 존재로 이해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불교에서 보는 것처럼 인류뿐 아니라 살아 있는 것 전체를 존엄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상이 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을 신분이나 인종에서 찾지 않고 이성적인 능력에서 찾으면서, 인간은 다른 부족이나 인종 혹은 신분을 지배하는 것을 목표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성적 잠재력을 충분히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사상이 나타났습니다. 아울러 인(仁)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내세우는 공자의 사상과 존재자들을 비교하고 차별하는 인위가 아니라 자연적인 무위의 도를 구현할 것을 주창하는 노장의 사상이 나타났던 것도 바로 이 차축시대 때입니다. 야스퍼스는 이 시대를 그 이전 시대의 목적이고 그 이후의 시대의 기원이 된다는 의미에서 세계사의 차축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차축시대는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서 건립되었고 이러한 철학자들의 업적은 그 후의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서 계승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위대한 철학자들로서 소크라테스, 불타, 예수, 공자, 플라톤, 칸트, 노자, 용수, 스피노자와 같은 사람들을 들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서양의 전통철학의 해체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철학이 전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보는 반면에, 야스퍼스는 자신의 철학의 과제를 위대한 철학자들의 전통을 보존하고 그들 간의 생산적인 대화를 매개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우리의 과제는 전통을 해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축시대에 위대한 철학자들이 제시한 위대한 삶과 사상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야스퍼스와 마찬가지로 차축시대 이후의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은 시대와 지역에 상관없이 사실은 동일한 사태를 지향한다고 생각합니다. 야스퍼스는 인간과 세계를 포함하는 존재 전체의 실상은 차축시대 이후 인류의 역사에서 어떤 때는 인격적인 창조주로서 혹은 일자(一者)로서 혹은 세계의 건축가로서 혹은 도(道)로서 혹은 공(空)으로서 혹은 무(無)로서 혹은 사랑으로서 자신을 드러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이 모든 것들은 존재 자체에 대한 암호이지 실상 자체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야스퍼스는 모든 철학과 종교는 자신들이 암호에 지나지 않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들이 자신들만이 존재 전체의 실상 자체를 드러내고 있다고 자부할 때 그것은 다른 암호들에 대한 광신적인 배타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야스퍼스는 이와 함께 세계의 모든 철학이 존재 전체의 실상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서로 대화하면서 서로 돕는 세계철학의 이념을 제창하고 있습니다.
저는 불교와 하이데거의 저술도 존재 전체의 실상 자체를 가리키는 암호라고 보았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사태를 가리키기에 서로 대화가 가능할 뿐 아니라 서로 간의 대화를 필연적으로 요구합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서 그것이 가리키고자 하는 존재 전체의 실상 자체는 보다 명료하게 그리고 보다 풍요롭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제 논문에서 수행한 불교와 하이데거의 비교뿐 아니라 모든 비교철학은 비교되는 철학들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들 간의 대화를 매개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하게 하고 심화하는 것을 목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동안 제가 수행해 온 연구에서 제가 생각하는 비교철학의 이러한 이념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서양철학과 불교를 비교하기에는 불교에 대한 저의 이해가 아직 일천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반야학술상 심사위원회가 이렇게 상을 저에게 수여하는 것을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과분한 상으로 격려해 주신 반야학술상 심사위원회와 반야학술상을 제정하여 불교학의 발전과 진흥에 애쓰시는 반야불교문화연구원장 지안 스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제 6회 반야학술상 수상자 강연자료(박찬국 교수)http://banya.pibs-app.net/files | 반야불교문화연구원 | 2016-12-05 | 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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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회 반야학술상을 수상한 두 분께서 수상소감과 더불어 수상강연을 해 주셨습니다. 저술상을 수상하신 고영섭 교수님의 강연 전문입니다.
저술상 : 고영섭(동국대 교수)
- 수상저서 : 『한국불교사 탐구』
- 강연주제 : “국학 혹은 한국학으로서 불교연구; 원효학 (철학)과 삼국유사학(사학)의 궁구”
- 수상자 약력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불교철학, 인도철학 전공) / 동국대학교 석사과정 졸업(인도불교 전공) / 동국대학교 박사과정 졸업(한국불교 전공) / 고려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동양철학, 한국철학 전공)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역임 / 서울대 종교학과, 서울대 대학원 종교학과 외래교수 역임 / 한림대, 강원대 철학과, 서울시립대 시민대학 외래교수 역임 / 하버드대학 아시아센터 한국학연구소 연구학자(2010~2011) /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재직(2003~ 현재) / 한국불교사학회 한국불교사연구소장 / 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장
- 저서
『원효, 한국사상의 새벽』(한길사, 1997) / 『불교경전의 수사학적 표현』(경서원, 1997) / 『서명 문아(원측)학통 연구: 문아대사』(불교춘추, 1999) / 『한국의 사상가 10인, 원효』(예문서원, 2002) / 『원효탐색』(연기사, 2002) / 『한국불학사』 1~3(연기사, 1999~2005) / 『한국불교사연구』(한국학술정보, 2012) / 『한국불교사탐구』(박문사, 2015) / 『삼국유사 인문학 유행』(박문사, 2015) / 『분황 원효』(박문사, 2015) / 『불학과 불교학』(씨아이알, 2016) / 『분황 원효의 생애와 사상』(운주사, 2016) 외 다수
● 수상강연
- ‘국학’ 혹은 ‘한국학’으로서 불교연구 : ‘원효학’(철학)과 ‘삼국유사학’(사학)의 궁구 -
고영섭(동국대 불교학과)
오늘 저는 불교학술상으로서 권위를 쌓아가고 있는 반야학술상(저서부분) 수상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한국불교 및 동아시아불교사상사 분야에는 문학, 사학, 철학, 종교, 예술 등 아직 도달하지 못한 연구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저는 이 학술상을 앞으로도 이 분야 연구의 빈틈을 더 채워달라는 요청과 격려로 알고 더욱 더 정진하고자 합니다.
만학의 제왕은 철학이 아니라 국학입니다. 서양의 철학은 서양의 국학이요, 서양철학사는 서양경학사며, 중국철학사는 중국경학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경학은 ‘보편적인 학문’, ‘영원불변한 학문’, ‘모든 것의 벼리를 이루는 학문’인 반면, 국학은 ‘국소적인 학문’, ‘지역적인 학문’, ‘상대적인 학문’으로 오해받아 왔습니다. 이러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은 동아시아적 문명질서를 장기간 지배한 중화주의적 권력구조가 뿜어낸 무의식적 편견에 의해 경학과 달리 국학을 국부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치부해온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주석학인 경학은 중국의 국학일 뿐이며, 이 국학의 기반을 이룬 문헌 또한 춘추전국시기 이후 서한시대에 뒤늦게 성립한 비중국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국학은 경학에 필적하는 주체적이고 자내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학’이 우리 민족문화와 정신문화의 주체적 표현이라면, ‘한국학’은 우리 민족문화와 정신문화의 타자적 표현입니다. 우리의 문학과 역사와 철학과 종교와 예술에 대한 자내적 지평을 인문학이라 한다면, 우리의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와 과학에 대한 객관적 온축을 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횡단적 인문학과 종단적 사회학을 아우르는 국학연구가 우리의 정체성을 주체화하는 학문방법이라면, 한국학 연구는 우리의 인식틀을 타자화하는 학문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대자유를 추구하는 불교는 인류의 지혜와 자비를 중도 연기로 총섭하고 있습니다. 상호의존의 연기법과 상호존중의 자비행을 아우르는 불교는 연기의 지혜와 중도의 자비로 우리의 삶터를 질적으로 제고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불학 혹은 불교학은 이 땅에서 오랫동안 국학 또는 한국학의 저변을 이루어 왔습니다. 이 때문에 이 땅의 연구자들에게는 국학 또는 한국학의 기반을 이루는 한국불교사상과 한국불교역사의 기반을 보다 주체화하고 자내화하여 더욱더 객관화하고 타자화하는 노력이 요청됩니다.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모든 성취를 일심(一心)의 철학으로 구축한 분황 원효(芬皇元曉, 617~686)는 인간의 심연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깊은 탐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본래마음’[心源]이자 ‘하나를 향한 그리움’인 일심(一心, 진여)과 일심지원(一心之源, 본각)의 구도로 부처와 중생, 진여와 생멸이 별체가 아님을 확연하게 갈파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원효는 어젯밤 잠자리[土龕-且安]와 오늘밤 잠자리[鬼鄕-多祟]의 분별이 사실은 일심이 지닌 두 측면의 발현이었음을 또렷하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것은 작은 나가 있다는 인식[有我]이 큰 나[無我]를 넘어 더 큰 나[大我, 眞我]로 나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 과정을 그는 세 가지 미세한 번뇌 즉 삼세(三細)와 여섯 가지 거치른 번뇌 즉 육추(六麤)의 구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원효는 먼저 무명(無明)으로 념(念)이 일어나는 ‘무명업상’(無明業相, 業相)과 마음이 자신을 찾아 바라보려고 하여 능히 보는 모습인 ‘능견상’(能見相, 轉相) 그리고 그 눈에 보여지게 하는 경계로서 나타난 모습인 ‘경계상’(境界相, 現相)의 삼세상(三細相)을 제8(아려야)식에 짝지었습니다. 이어 나를 개별 자아로 잘못하는 모습인 ‘지상’(智相)을 제7(말나)식에 배대한 뒤, 잘못된 념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모습인 ‘상속상’(相續相), 유근신의 나는 자신과 자신 밖의 세계를 자와 타, 주와 객으로 이원화해서 집착하는 ‘집취상’(執取相)과 이러한 분별에 사용된 언어에 매인 모습인 ‘계명자상’(計名字相), 의식의 분별 집착에 따라 업을 짓는 모습인 ‘기업상’(起業相)을 제6(요별경)식에 대응시키고, 그 업에 따라 고통의 보를 받는 모습인 ‘업계고상’(業繫苦相)을 고과(苦果)에 배대하여 육추상(六麤相)의 구도 아래 망념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분별사식)과 의(말나식과 아려야식)의 작용, 다시 그것을 상응염(執, 不斷, 分別智)과 불상응염(現色, 能見心, 根本業)으로 해명하고 있습니다.
원효가 근본번뇌에 해당하는 삼세상을 현식(現識)인 제팔식에 배대한 것은 부처의 지위에서 비로소 무명주지번뇌를 끊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며, 분별사식(分別事識)인 육추상의 지상을 제칠말나식에, 생기식(生起識)인 상속상, 집취상, 계명자상, 기업상을 제육요별경식에, 그리고 소생과(所生果)인 업계고상을 고과(苦果)에 배대한 것은 일승과 삼승의 전관적 구도 아래 파악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반면 담연은 삼세를 제칠식이라 하고, 육추를 제육식이라 하였으며, 정영사 혜원은 무명업상, 능견상, 경계상, 지상, 상속상까지는 제칠식이라 하였고, 집취상, 계명자상, 기업상, 업계고상을 제육식이라 하고, 아리야식은 직식(直識)이라 하였습니다. 또 법장은 무명상, 능견상, 경계상의 삼상을 아리야식에 배대하면서도 지상, 상속상, 집취상, 계명자상, 기업상, 업계고상의 육추는 육식이라 하여 제칠식은 논하지 않았습니다. 원효가 이들과 달리 삼상을 아리야식에 배대하고, 육추를 각기 제7식과 제6식 및 고과에 배대한 것에서 우리는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원효 심성론의 독자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효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국학 혹은 한국학 연구의 최정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국 정신문화대백과사전이라고 할 『삼국유사』는 우리의 유전인자를 담고 있는 서물입니다. 이 저술은 원효의 저술과 함께 국학 또는 한국학의 정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효의 저술이 철학적 지향을 머금고 있다면, 이 저술은 사학적 지향을 머금고 있습니다. 원효의 저술이 인간의 심연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분석에 집중하고 있다면, 이 저술은 인간학과 고전학을 아우르고 있는 인문학의 본래적 의미를 되묻고 있습니다. 『삼국유사』가 붓다의 가르침을 머리와 가슴을 넘어 온몸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원효 저술은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인 중도에 입각하여 사견을 명쾌하게 파척(罷斥)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원효 저술이 철학서로서 한국학의 종축을 담지하고 있다면 『삼국유사』는 사학서로서 국학의 횡축을 견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종축과 횡축, 철학과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서 한국학과 국학의 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인각 일연(麟角一然, 1206~1289)은 선사이면서 국사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국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강화도경의 국립도서관을 애용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일연이 5권 9편 138조목에 담아낸 『삼국유사』에는 문학, 역사, 철학, 종교, 예술의 가로축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과학의 세로축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가 ‘불법’을 전달하는 ‘전법서’로 기획했든, ‘민족’을 호명하는 ‘역사서’로 기획했든 간에 이 저술은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대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앎과 삶의 경계를 무화시키며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꿈과 희망과 이상과 절망 등이 발효 숙성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불교의 상호존중적 중도행과 상호의존적 연기법대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들 고대인들은 천신, 산신, 무속 신앙을 아우른 풍류도를 통섭한 불교적 세계관 아래서 머리와 가슴을 넘어 온몸으로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삼국유사』는 일체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운 생의 의지를 지닌 ‘펄펄 살아뛰는 인간’, ‘적나라한 인간’, ‘벌거숭이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새로운 삶의 방식과 앎의 양식으로 담아내었습니다.
일연은 어려서부터 효(孝, filial piety) 대한 관심이 매우 깊었습니다. 그는 만년의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국사의 자리에서 물러나 인각사 인근 사가에 어머니를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보살폈습니다. 이러한 그의 효 인식은 『삼국유사』 마지막 부분에 「효선」편을 두는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편에 실린 것은 ‘진정사 효선쌍미’, ‘대성효 이세부모’, ‘향덕사지 할고공천’, ‘손순매아’, ‘빈녀양모’ 등 5편뿐입니다. 하지만 이들 조목에 나타난 ‘효’와 ‘선’ 인식은 유교의 ‘일’(一) 부모를 향한 ‘일효’(一孝)와 달리 ‘만’(萬) 부모를 향한 ‘만효’(萬孝) 즉 ‘대효’(大孝)의 인식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연은 유교의 효행을 적극적으로 섭수하여 불교의 선행으로 확장시키고 심화시킵니다. 그리하여 그는 효의 문제를 정치와 사회와 윤리의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와 철학과 사상의 문제로 환치시키고 있습니다. 삼국유사학이 국학 또는 한국학 연구의 태산이 되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불교연구는 국학과 한국학의 시선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동시에 인간학과 고전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적 시선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종교학이 되었든, 서양철학이 되었든 하나의 범주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아니됩니다. 원효학과 삼국유사학은 하나의 학문적 범주를 넘어서게 합니다. 아니 원효학과 삼국유사학은 하나의 학문적 범주로 온전히 재단할 수 없는 국학 또는 한국학의 태산입니다. 이들에 대한 온전한 궁구(窮究)는 융합 내지 복합의 지평 위에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들 서물들이 국학 혹은 한국학의 태산으로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들 서물에 대한 1천여 편 이상의 연구논문이 나왔지만 아직도 남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는 것은 원효학과 삼국유사학이 국학 또는 한국학의 태산이라는 점을 반증해 줍니다. 오늘 저는 이 두 주제를 평생의 화두로 들고 때로는 국학의 시선으로 때로는 한국학의 시야에서 또렷또렷하고[惺惺] 고요고요하게[寂寂] 들어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 제 6회 반야학술상 수상자 강연자료(고영섭 교수)http://banya.pibs-app.net/files | 반야불교문화연구원 | 2016-12-05 | 228 |